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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4월호] 귀농일기 - 박계해(9기)

작성자: 사무국

조회: 3109 등록일: 200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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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마음
                                                  박 계 해 (9기)

귀농 후 처음으로 부모님이 오셨다.

첫날은 비가 많이 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도 컸지만 귀농 후, 우리 가족이 처음 오는 것이라 두려움도 컸다. 
아버지는 워낙 열린 마음에다 매사에 집착이 없는 분이라, 별 걱정이 안됐지만 엄마는 다르니까........

역시, 엄마는 만나자 말자 한숨을 푹푹 쉬며 '언제 학교 갈래' 타령을 늘어놓으셨다. 
휴직 중이라고, 쉬고 나면 학교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계신 게 분명해서 다행이었지만, 안 그래도 맘이 쓰이는데 계속 안타까운 눈빛을 하고 계시니까 나도 편하지가 않았다. 
게다가 도착 할 때부터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점점 거세어져서 밤새도록 퍼부었다.  
습할 것 같아 승희씨에게 연탄을 좀 피우라고 했더니, '괜찮다'며 안 피우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피우는 게 좋겠다고 하셔'하고 둘러댔다. 승희씨도 나처럼 쓸데없는 고집을 많이 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연탄불을 내 맘 내키는 대로 피울 만큼' 자유롭지 못한 구석도 있다. 작은 일에만(!) 꼭 허락을 받는다 (외박 같은 거는 통보만 하지 허락 안 받는다). 한마디로 우리 관계는, '큰 자유 작은 구속'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건 화가 난 얼굴로 연탄을 피우러 가는 승희씨를 보며, 결국 엄마 입에서 또, '이 서방은 정말 꼼쟁이다'라는 말이 나오고 말았다.  연탄이 아까워서라고 생각하시는 게 분명했다. 
사실 큰일엔 대범하고 작은 일엔 쫀쫀한 승희씨는 '쫀쫀한 작은 일'만 보게 되는 엄마의 눈에 영? 幣?쫌생이다.

한 여름인데도 습기 때문에 방이 눅눅해서 불을 피운 건 잘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새벽 한 시가 되어도 방이 계속 눅눅해서 옆에 자는 승희씨에게 연탄 불문을 확 열고 태워버리자고 했더니, '자다가 연탄 가는 일은 누가하고?'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확 피우면 일찍 다 탄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냥 누워 있다가 아무래도 추워서 살짝 일어나 연탄보일러 화덕이 있는 바깥으로 나갔다. 마루문을 열자 빗소리가 거세었다. 
불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한참을 누워있어도 잠이 오질 않아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오후에 커피를 마신 게 치명적이기도 했고 부모님이 같이 있다는 사실에 진정이 잘 되지 않았던 탓이다. 
아니 어쩌면 비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너무도 좋아하지만 틈만 나면 '왜 이렇게 사냐?'는 탄식을 해대는 엄마 때문에 비가 그치기를 바라느라 맘을 졸이느라 그랬던 것! 이다. 
비가 오면 몇 군데 비가 새는데 비가 새는 것을 보면 더 속상해 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린 비가 샌다는 것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팔순을 앞둔 부모님께 설명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석탄 박물관으로 갔다. 보고 나오신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시며 기념사진을 한 장 박자고 하셨다.  사진을 찍고 난 아버지는 우리도 몰랐던 총각 시절 얘기를 들려주셨다.

'총각 때 내가 일본의 탄광에서 '안전요원'으로 일했었지.......'로 시작되는 이야기였는데 엄마도 처음 듣는 얘기라고 하셨다. 
탄광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젊은 날의 아버지는 지금, 일흔 여덟의 이 순간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윽한 눈으로 박물관을 바라보셨다.

거기서 왕 건 촬영장으로 출발을 했다.  창밖으로 가은 읍내 쪽을 바라보면서 내가, "대부분 탄광 일을 하던 예전에는 저기가 온통 색시 집이었대요" 했더니 "그랬겠지, 탄광 일이란 게 전쟁터에 있는 거나 매한가지거든, 언제 죽을지 모르니 그랬을 거야......."하며 눈을 지긋이 감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집으로 돌아와서 녹여두었던 돼지고기를 구워먹는데 부모님이 이제 그만 가야겠다고 해서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버지는 순전히 내 맘을 다칠까봐 '그래!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은 거야"라고 하셨지만 "그렇지만....... 자식 공부도 시켜야 하고......."라고 기어이 중얼거리셨고, 엄마는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정이어서 그런 상태로 헤어진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중에 승희씨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이웃 아주머니들이 들락거리고 장선생이 오고, '평소와 다름없이' 우리 아주머니가 잔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에 고기를 먹던 엄마가, "웬 사람들이 이리 온대냐?  맨날 이러냐?" 하기에, "응, 이상하게 오늘 그러네"하고 얼버무리는데 승희씨가,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많이 오면 좋지 않습니까, 오늘은 좀 덜한 겁니다.  하하하!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자기 딸이 힘들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인데 눈치 없이 그렇게 말하니까 기가 차서 툴툴거렸더니 승희씨는 기분이 확 나빠져서 󰡐내가 말을 아예 안 해야지'라고 하며 얼굴이 험해졌다. 
그 사이 엄마가 승희씨를 불만스런 얼굴로 바라보아서 엄마까지 미워졌다.  엄마는 '저 인간이 선생질 잘 하고 있는 우리 딸을 촌에 데려와서 고생시킨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쨌건 짐을 챙겨 모두 차에 오른 다음 '생선이라도 사 드세요'하고 엄마 주머니에 봉투를 쑤셔 넣었고, "아이구, 돈도 안 버는 것들이....... 쌀이나 사 먹지"라는, 안 했으면 더 좋을 말을 들었고....... 두 분은 떠나셨다.

그리고 나는 바로 자리에 누웠고, 악몽을 꾸기도 했고, 끙끙 앓는 내 소리에 스스로 놀라 깨기도 하면서, 다음날 늦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전날 밤 엄마랑 얘기하느라 잠을 못 잔 탓이기도 하고, 너무나 오랜만에, 귀농하고 처음으로, '나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기만하느라, '그래야만 하느라' 온 신경이 지쳤던 것 같다.

이번 일로 나는󰡐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온몸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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