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12월호] 귀농일기 - 황재숙(12기) :: 부산귀농운동본부(구-부산귀농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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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일기

제목 : [2004년 11,12월호] 귀농일기 - 황재숙(12기)

작성자: 사무국

조회: 3577 등록일: 2008-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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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첫 농사                  
                                                  
                                               황 재 숙 (12기)

"거기 못질 한 번만 더해 주세요, 네에?", "이 사이에도 각목 하나만 더 넣으면 안돼요? 그 냥 넣어 주세요. 각목 하나 4000원 밖에 안 하는데......", "피스(판넬과 판넬 사이 이을 때 쓰는 나사) 좀 촘촘히 박아 주세요."
나는 건건이 쫓아다니면서 애걸하고, 대목은 일일이 "그럴 필요 없다" 며 설득하고..
구조 역학을 1%도 모르는 나로서는 모든 것이 그토록 불안했다.

처음 빠레뜨와 빠레뜨를 옆으로 붙이고, 위로 쌓으며 벽을 만들었을 땐 지나가다 건들기만 해도 울렁울렁(내가 아니고 벽이).. 조카놈들이 왔다가 발차기 한 번 하면 이 벽이 남아나지 않을텐데...... 속이 탔다. 피스 몇 개로 대들보에 꽂힌 판넬 지붕도 못 미덥긴 마찬가지여서 혹여 작년 매미 같은 놈이 올해도 덮치면 어떡하나 노심초사였다.
'과연 이대로 계속 해도 되는가?' 나 자신에게 숱하게 물었다.

비로소 지붕이 다 앉아 벽체가 내 손아귀의 힘-빠레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을 조용히 삼킬 때까지.
내 집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이 말은 흔한 공법, 흔한 재료를 조금 많이 비껴 가며 지었다는 얘기다.  귀농학교 선배의 농장을 기웃하며 빠레뜨의 효용성에 눈뜨게 된 나는 󰡒폐자재를 활용해 집을 짓는다면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자연 자원을 훌륭히 갱생시킬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무차별적 소비로 인한 자연의 무한한 훼손을 조금이라도 막고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제 집도 빠레뜨로 지어 주십시오" 하고 용감하게도 의뢰를 했다. 
부탁을 받은 선배 역시 그때 까진 나의 무식한 행태가 눈앞에 드러나기 전이라 맘씨 좋게 허락을 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전쟁이었다.

4년 귀농 경력으로 쌓은 집짓기 노하우로 아무리 쉽게, 끈기 있게 설명해도 일단 기초가 없는 자 앞에서는 사이비 교주의 말처럼 의심스럽기만 했다.  급기야 누군가 도우러 와서 이런 말을 내뱉었다.

"지금 충무동 육교 짓나!"

이때서야 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지나친 기대와 막연한 불안감으로 계속 짓는다면 이 집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 동안 동네 어르신들이 󰡐주인이 아홉 몫을 해야 한다󰡑 말씀하신 뒤로 입으로 아홉 몫을 다 해 오던 나는 이제서야 망치와 삽을 직접 들고 때리고 하며 스스로 이 집을 느끼게 됐다.  그러고부터는 한결 유연하게 일을 거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내 맘을 무장해제 시켰던 것은 내가 그렇게 아등바등 지어봐야 이 집은 백 년도 안 갈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내가 백 서른 둘까지 살지 않는 다음에야. 앞으로 50년만 버텨주면 충분할 이 집을 위해서 내 몸과 마음에 병이 들어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재미가 붙기 시작한 집짓기는 내가 너무 즐기는 탓인가?  8월 20일자로 첫 삽을 뜬 이래~ 아직 끝이 나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집짓기를 통해서 내가 용감해지고 씩씩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귀농에 대한 99가지 다른 이유보다 자연과 가까이 살고 싶다는 1가지 이유가 더 절실했지만, 분명 시골은 도시보다 살기 힘든 곳이었다.  시장도 멀고 심지어 화장실도 언제나 멀었다.  그럼에도 보따리를 쌌을 때는 어떤 모델이 필요했다.  나처럼 맨 땅에 헤딩하고도 머리 안 깨진 사람. 그런 사람을 무작정 카피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그런 다음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살리는 건 더 이상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시골로 들어가는 것은 나의 선택이지만 그곳에서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는 건 내가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거니깐. 나에겐 그랬다.

󰡐난 아직 젊으니까 지금 성공적으로 안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중에 다시 시골살이하게 될 때 더 잘 할 수 있는 밑불이 된다.  그러니 절대 실패란 없다󰡑 라고 애써 타일렀지만, 󰡐과연 그럴까, 떠나고 다시 찾는다는 건 수 십 년의 다리를 건널 일인데…...󰡑 내 속에선 요렇게 가그작거리는 소리도 들렸던 거다.  이런 압박이 나를 좀 더 억척스럽게 한 건 분명했다.

처음 만져 보는 농기구는.. 어려웠다.  이름부터 에로웠다. 내가 아는 건 오로지 삽뿐이니.....
호미랑 낫도 잠깐 생각을 해야 구분이 갔다.  내가 보기엔 호미도 기역자였다.  요령이 없어 힘으로, 몸으로 하자니 팔, 다리, 심지어 배에도 멍과 통증이 생기면 삭을 새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동네분들과도 거리가 좁혀지고 더 이상 수상한 사람이 아닌 다동 할매집 사람이 되어 갔다.  느리지만 부지런한 그 곳의 일상에 하루하루 정들어 갈 때 봄이 나를 응원했다.(처음 찾아갔을 땐 여전히 추운 3월이었다) 먹을 것이 여기 저기서 솟아올랐다.  냉이, 달래, 쑥, 머위.. 이들이 내게 몸짓했다.  아! 사실 난 베짱이의 삶을 찬양하는 인간이었다.

그렇게 푹 빠져서 즐기는 동안에도 딴엔 열심히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또 갈고 뿌리고 다시 갈고 뿌리고......
그러는 동안 자신감이 비대해져 본격적으로 사고를 치게 됐다. 
짧은 기간 내가 밀양에서 쌓은 인적 네트워크를 다 동원해 땅을 알아봤지만, 지난 1~2년 사이 밀양은 부동산업자들에게 부쩍 뜨는 상품이 되어 있었다.  찜했던 땅은 번번이 주인들로부터 거절당했다.  운전면허 기능시험 네다섯 번 떨어질 때보다 더 큰 좌절이었다. (그래서 난 10년 전부터 쭈욱 뚜벅이다)

그런 고비를 넘고 또 넘었더니 지금 내 집이라고 짓고 있는 이 땅이 나는 너무 고맙다.
내게로 와 주었고, 나를 품어 주었으므로.
집짓기는 자립을 위한 훈련이면서도 함께함의 가치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난 내가 살 집이 지어진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집을 내가 짓지 않고서는 의미도 없고 그런 집이라면 도시에서 분양 받는 아파트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지런히 물어보고, 배우면서 공정 하나 하나를 내 것으로 익히려 애썼다.  이 집구석 구석에 나의 눈길과 마음 길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몸은 다 따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이라도 따라 가려고 열심히.. 카피했다.

집의 구조, 창문 크기나 위치, 지붕 스타일과 각도, 각종 재료 선택에서 구입, 사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대목과 의뢰인인 내가 함께 의논하며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집의 큰 장점이다.  스스로 집을 짓는다면야 모든 것이 당연 자기 몫이다.  하지만 나처럼 못질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로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 그것은 분명 큰 행운이다.
자재를 사러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쪽 계통 사람들은 거칠어서 나 같은 애송이가 가면 안 깎아줄까 싶어 물건의 단위, 용어 등을 사전 숙지하고 가서 떠들어댔다.  가령 이런 식이다.

"지붕에 쓸 거지만.. 벽체용 판넬이 필요해요, 50T는 좀 얇은 것 같고.. 75T로 해주시구요, 1m 당 가격은 얼맙니까, 지금 그 물건이 없어요? 음, 어쩌지 급한데. 뭐, 불량난 것도 괜찮으니 그냥 주세요."(사실 불량난 건 크게 하자가 없는데도 반값 정도로 살 수 있다는 걸 미리 알아놨다)
약간 거친 억양으로, 잘못 건드렸다간 당신들 재미없다는 듯 눈썹 끝을 한껏 끄댕겨 올린다.
물론, 이건 만구 내 혼자 쓴 시나리오다.  그들은 결단코 나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나는 다만 사람과 어울리는 매일의 훈련을 재미난 연극처럼 꾸며 스스로 즐기고 있었던 거다.

집을 지으면서 가장 아쉬운 건 당연히 사람 손이다.  그 걸 가장 뼈저리게 느낀 건 지붕 올릴 때였다.  상량식의 의미를 나는 나름대로 해석해 봤다.  떡을 돌려 사람들을 부르고 그 떡 한 점에 너그럽게 품을 앗아주는.... 그래서 그 힘든 작업을 공동체의 힘으로 무사히 치루자는 의식이 아니었을까. 
나는 상량식이 뭔지도 몰랐고, 대들보 위에 판넬 한 장을 얹는 것이 그리 힘든 줄도 몰랐다.

내 입에서 "이건 미친 짓이지. 이런 일을 두 사람이서, 그것도 기술자 하나에 그저 있으나 마나 한 인간 하나 겨우 보태서." 막 터져 나올 때, 하늘이 도우셨다.  그날 따라 지나가는 이웃들이 많았다.  집이 어찌 돼 가나 구경하러 왔던 그 분들 입장에선 때아닌 봉변이었지만, 나한테야 그 분들이 특별 보너스였다.  그렇게 마지막 지붕 한 장을 올렸을 때의 감격과 감사함이란…...

그런 감격은 벽체에 흙을 이개 넣으면서 또 한 번 느꼈다.  귀농학교 동문들이 여러 차례 와서 함께 흙을 이개고 벽 구석구석 채워 넣으면서 나 혼자였으면 하다 죽어 버렸을 일을 무사히 해냈다.  이번엔 너무 몰라서 지었지만 다시 흙집은 짓지 않겠다 맹세할 만큼 번거롭고 많은 일이었다.  그나마 내 집이 5평에 지나지 않았기에 끝이라도 볼 수 있었을 거다.  그 때 한 손 한 땀 보태주셨던 분들이 너무 고맙다.

집짓기란 옛 어른들껜 또 하나의 농사가 아니었을까.  사는 동안은 해를 거르지 않고 손을 보고, 큰손이 필요할 땐 언제나 이웃과 두레하며 마음 넉넉히 거두는 농사 말이다 .
올해의 집짓기는 내겐 "사람답게 사는 농사"의 첫 수확인 셈이다.

<우리끼리만 통하는 백과사전>

빠레뜨 : 부산에 있는 모 업체에서 화물 수입시 받침대로 쓰고 버리는 가로 110cm, 세로 70cm, 폭 10cm의 나무로 된 직육면체의 곽이다. 
충무동 육교 : 구조역학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았던 시절 지어진 오래된 육교로서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보기 갑갑할 정도로 붙이고 덧대어 만든 물건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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